PUKYONG

일제하 在日 王公族의 형성배경과 관리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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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ernative Title
The Formation Background and Management System of Wanggongjok Residing in Japan Under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Abstract
이상에서 일제가 조선 왕실을 어떻게 해체시켜나갔는지를 ‘재일 왕공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일제의 대왕공가 정책의 요체는 조선 민중들의 마음속에서 조선 왕실을 삭제시키는 데에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제는 그들의 식민통치에 대해 조선 민중들의 심적 동의를 이끌어내고자 했고, 이를 위해 필연적으로 조선 왕실이 민중들에게 미치는 심적 지배력은 철저히 해체시켜야 했다.
이러한 목적 아래 일제는 기왕에 조선 민중들과 강력한 연결고리를 맺고 있는 고·순종은 예외로 하더라도, 그들의 사후 조선 왕실을 이끌게 될 후계자들에 대해서는 강력한 관리정책을 통해 조선민중들과의 완전한 분리를 꾀했다. 그 체현이 바로 조선 왕실의 후계자, 즉 왕공족에 대한 도일 정책이었다. 1907년 12월 황태자 신분이었던 이은의 일본 유학행은 그러한 정책의 첫 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제는 후일 순종의 계승자가 될 영친왕 이은을 자신들의 철저한 관리 하에 둠으로써 조선 식민정책에 방해가 될 위험요소를 사전에 예방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요 식민 이데올로기였던 ‘문명개화’의 표상으로서 영친왕 이은을 이미지화해 나갔다.
한일합병 이후 진행되었던 일제의 대왕공가 정책을 살펴보면, 이러한 그들의 의도는 더욱더 여실히 드러난다. 일제는 우대 정책과 고립화 정책을 통해 끊임없이 조선 왕실의 약체화를 실현해나갔다. 그리고 이에 따라 조선 왕실의 권위와 상징성은 점점 실추되었다. 조선 왕실을 상대로 소송사건이 벌어지는 한편 심지어 영친왕 이은에 위해를 가하려는 사건 등의 발생은 조선 왕실이 민중들에게 미쳤던 심적 지배력의 상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조선총독부가 판단하기에도 ‘이화의 색채가 점점 쇠퇴할 것은 필연의 도리’였다.
하지만 조선 민중과 강력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고종과 순종이 살아있는 한 조선 왕실의 약체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고·순종의 사후 식민지 조선에서 대왕공가 정책을 완결하기 위해 준비 작업을 실행해나간다. 바로 앞서 영친왕 이은처럼 조선 왕실의 새로운 상징으로 거듭날 이건, 이우, 덕혜옹주 등을 모조리 일본으로 유학시킴으로써 공간적으로 왕실과 조선 민중들의 완전한 단절을 꾀한 것이다. 결국 순종 사후 李王의 지위를 계승한 영친왕 이은 또한 조선 왕실의 상징물인 창덕궁에 기거하지 못하고 왕세자 시절과 마찬가지로 동경에 상주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조선 왕실을 약체화시킨 후 종국에 가서는 조선 내에서 그들의 흔적 자체를 해체하고자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치밀한 계획 속에서 조선 왕실의 후계자들을 ‘재일 왕공족’으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재일 왕공족에게서 조선 왕실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공간적인 이동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재일 왕공족을 일본 사회 내로 자연스럽게 흡수시켜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느끼기에도 자신이 조선 왕족이었음을 망각해버릴 때 비로소 일제의 대왕공가 정책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일제는 이들을 어떻게 일본 사회 내로 흡수시킬 것인가라는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했던 전제조건은 ‘왕공족’이라는 신분을 제도적으로 명확히 하는 데에 있었다. 즉, 왕공족은 누구이며, 이들이 일본 사회 속에서 차지하게 될 법적 지위를 어느 정도로 위치지울 것인가에 대해 확정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까지 지속되고 있던 왕공족이라는 신분이 가지는 모호성이 이제는 해결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순종 사후 영친왕 이은이 이왕을 계승한 그 해에 공포되었던 「왕공가궤범」은 바로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 통해 재일 왕공족은 일본 황족 다음의 반위에 위치하며 천황이 통치하는 제국 내의 충실한 구성원으로 기능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부여받았다.
「왕공가궤범」의 제정과 더불어 조선 왕실의 후계자들을 자연스럽게 일본 체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선택된 방법은 정략결혼이었다. 영친왕 이은과 황족 방자비의 결혼을 시작으로 덕혜옹주와 이건 등은 차례로 일본 화족 가문과 혼인을 맺는다. 이우만이 일제의 극심한 감시 속에서 조선인과 결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재일 왕공족의 정략결혼은 ‘일선융화’라는 논리 아래 정당화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침략적 요소가 다분히 존재한다. 일제는 이 정략결혼을 통해 조선 왕실이 가지는 귀종성을 해체시키는 한편, 재일 왕공족의 일본 거주를 고착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본에 정착하게 된 재일 왕공족은 기본적으로 이왕직의 관리 하에 있었다. 먼저 王家에 대한 관리를 살펴보면, 영친왕代의 이왕직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다. 일제는 순종의 죽음을 분기점으로 조선 내 대왕공가 정책의 완결을 꾀하였고, 이러한 의도가 그대로 이왕직 조직상에도 반영되었던 것이다. 우선 첫 번째로 李王職의 이분화이다. 앞서 주시하였듯이, 영친왕은 이왕의 지위를 계승한 이후에 대한제국 황실의 자취가 남겨져 있는 경성에 있지 못하고, 왕세자 시절과 다름없이 일본 동경에서 거주한다. 결국 일제가 왕공족의 상징인 이왕의 동경 상주를 통해서 왕공족 도일정책의 완료를 실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이왕직 기구도 이분화된다. 기존의 경성 소재 이왕직은 그대로 두는 대신에 이은의 鳥居坂 御用邸 內에 출장소 격인 사무소를 두어 일본 내 이은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게 한 것이었다.
두 번째로는 이왕직의 축소화를 들 수 있다. 1926년 순종 사후 이왕직 직제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바로 贊侍와 掌侍司의 폐지가 그것이다. 찬시는 합병 이후 왕공족 중에서도 고종과 순종 및 영친왕 등 왕족에게만 近從하며 身側의 일을 담당했던 職員으로, 대한제국 시기 궁내부 내 侍從의 기능을 계승한 관리였다. 그런데 이러한 찬시 제도가 순종의 붕어 후 영친왕이 이왕을 계승하는 시점에서 폐지된 것이다. 이는 일제의 대왕공가 정책상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조선 왕실에 대한 기존 우대정책 중에서 중요한 특권을 회수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황실에서도 찬시에 해당하는 侍從이라는 관직이 설치된 기관은 천황을 모시는 侍從職과 황태자를 모시는 東宮職 등 2개 관서 뿐이었다. 직제상 일반 황족들에게는 家務를 담당할 사무관들만이 배정되어 있었고 시종의 일을 담당하는 관리는 전무했다. 수족과도 같았던 찬시의 폐지는 이왕직의 축소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동경에서 영구히 상주하게 될 영친왕을 더욱더 고립시키는 조치였다.
한편 일제는 찬시를 폐지하는 대신, 정식관제로써 일본 황족의 예에 준하여 왕공족에 왕공족부육군무관을 부속시켰다. 이처럼 왕공족에 부여되었던 찬시라는 특권을 회수하고 이들에게도 예외 없이 일본 황실의 관례를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은 재일 왕공족의 일본 사회로의 흡수를 더욱 가속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在日 公家에 대한 관리도 재일 왕가와 유사한 형태로 진행된다. 기존에 운현궁과 사동궁에 있던 공가 사무소와는 별도로 이건과 이우가 거주하는 동경저에 별도의 사무소가 신설되어 일본 내 공족의 활동 및 동경저의 운영 등에 관한 제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영친왕과 이건, 이우 등은 명목적으로는 각각 왕가와 공가의 수장으로 家務를 관장해야 했지만, 이들이 왕공가의 행정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미미했다는 점이다. 실제 왕가 및 공가 행정은 대부분 이왕직과 이를 감독하는 조선총독부 및 궁내성의 결정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일본 내에서 재일 왕공족은 어디까지나 수동적 입장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Japan tried to increase its psychological control over the people of Joseon during its colonial ruling over the nation. It is because Japan judged that the people of Joseon with strong national consciousness would be hard to be managed simply by suppressing them with military force or economic power like other Western Great Powers. Japan induced the people of Joseon to accept its colonial ruling from their heart. In order for new ruling power to gain psychological agreement from its ruled party, however, it is inevitable to disconnect the link between the previous ruling power and the people beforehand. After getting rid of the royal family’s psychological control over the people of Joseon, Japan had to settle down in the position instead of the royal family.
Along with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Japan assigned to the royal family of Joseon a new social position, ‘Wanggongjok (王公族)’. Japan also newly built an organization, ‘the Office of Yi Royal Family (李王職)’, and it took whole charge of the tasks related to Wanggongjok. Although Japan granted the royal family the privilege equivalent to that of Japanese imperial family, there existed great pressure and supervision on the other side. This article intends to examine how Japan explicitly treated the royal family of Joseon favorably in this way but also weakened it at the same time. This is also the consideration on the process of how Japan dismantled the royal family’s psychological control over the people of Joseon.
A crucial theme selected for this work is ‘Wanggongjok drawn into Japan by force’. The descendants of Joseon’s royal family including Yeongchinwang, Yi Gun, Yi Woo and Deokhyeongju in their teens left for Japan at an early age under the pretext of studying abroad. They were the core persons that would newly consist of the royal family soon after the death of King Gojong and Sunjong. Since the two kings’ psychological control over the people of Joseon had been already solidly established, it was almost impossible for Japan to remove the tie between them. Therefore, setting them aside, Japan also attempted to separate the next-generation Wanggongjok completely from the people of Joseon through its thorough management. Japan’s policy to exile Wanggongjok from Joseon was operated in this background.
After immigrating the successors of Joseon’s royal family forcibly to Tokyo, Japan faced a difficult problem of how to absorb those into Japanese society. Thereupon, Japan clarified the social status that Wanggongjok residing in Japan would come to have within Japanese society through enacting ‘Wanggonggaguebeom (王公家軌範)’. After that, it promoted marriages of convenience between Wanggongjok residing in Japan and Japanese in order to stabilize their settlement in Japan and also disconnect the pure lineage of Joseon’s royal family. In brief, the descendants of Joseon’s royal family turned into ‘Wanggongjok residing in Japan’ by Japanese elaborate plan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m.
Author(s)
김기훈
Issued Date
2009
Awarded Date
2009. 8
Type
Dissertation
Keyword
재일 왕공족 조선 왕실 왕공족 도일정책 왕공가궤범 정략결혼 이왕직 영친왕 이건 이우 덕혜옹주
Publisher
부경대학교 대학원
URI
https://repository.pknu.ac.kr:8443/handle/2021.oak/11410
http://pknu.dcollection.net/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1955248
Alternative Author(s)
Kim, Ki Hun
Affiliation
부경대학교 대학원
Department
대학원 사학과
Advisor
신명호
Table Of Contents
Ⅰ. 서론 = 1
1. 연구목적 = 1
2. 연구현황 = 4
Ⅱ. 왕공족 渡日정책의 배경과 과정 = 9
1. 왕공족 도일정책의 시작-영친왕의 일본유학 = 9
2. 고.순종의 죽음과 왕공족 도일정책의 가속화 = 21
Ⅲ. 재일 왕공족 관리체제의 실상 = 34
1. 재일 왕공족에 대한 처우 = 34
2. 관리조직의 운영 = 57
Ⅳ. 결론 = 77
참고문헌 = 82
Degree
Master
Appears in Collections:
대학원 >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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