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KYONG

弘巖 羅喆의 大倧敎 重光과 朝天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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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ernative Title
The study of Hong-am Ra Cheol’s restoration of Daejonggyo and his Martyrdom
Abstract
홍암 나철의 대종교 중광과 조천 연구 요지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민족 종교와 민족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컸었다. 특히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한 신흥종교는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에도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큰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은 당시의 부패한 기득권과 외세에 저항하면서 민족 계몽운동의 형식으로도 나타났고 무력 투쟁 형식으로도 나타났다. 그리고 각기 다른 사상과 이념으로 인해 신앙의 방식은 달랐지만 자유ㆍ정의ㆍ평등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도 공동의 광장이 마련되었다.
이들 민족종교 가운데서도 홍암 나철(1863.12.2~1916.8.15)은 일제 강점 하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항일운동, 국학운동, 단군신앙운동 부분에서 활약한 역할이 매우 크다는 점을 인정받아 2005년 9월 문화관광부에서도 문화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철에 대한 역사학계의 성과는 매우 빈약한 형편이다. 그리하여 이 논문은 그의 생전의 구국활동 및 민족종교활동과 그의 사후에 미친 항일독립운동 및 단군신앙운동과 국학운동에 기여한 역사적 의미 그리고 조천(朝天)의 의미 및 장례의례의 의미를 중심으로 조명하였다.
이 논문의 구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크게 대종교 중광(重光)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논문의 정리를 좀 더 세부적으로 설명하면 중광(重光) 이전의 구국활동과 중광(重光) 이후의 구국활동 및 단군신앙 활동 그리고 그의 조천(朝天)이후 대종교 중심으로 주도된 항일 독립운동과 국학에 기여한 영향 및 조천(朝天)의 의미와 장례의식의 의미를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논문을 정리한 순서대로 요약하면 크게 네 가지로 압축하여 설명할 수 있다.
ⅰ) 나철의 구국활동이다. 그의 구국활동은 통감부시대 직전부터 애국계몽운동과 대일외교활동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통감부시대 이후부터는 친일파 피살을 위한 저격 활동과 민중계몽활동으로 본격화하였다는 사실들을 정리 하였다. 다시 말해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최동식(崔東植) 등 호남의 우국지사(憂國之士)들과 함께 1904년 비밀결사(秘密決死)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는 한편, 국채상환운동(國債相換運動)에도 참여하였고,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 단체인 ‘호남학회(湖南學會)’에도 가입하여 국권회복(國權回復)과 민중계몽(民衆啓蒙)도 전개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권(國權)은 점점 일본으로 예속되어 갔다. 그리고 1905년에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사실상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본으로 잠식되었다. 이에 분개한 나철(羅喆)은 오기호(吳基鎬), 김동필((金東弼), 박대하(朴大夏), 이홍래(李鴻來) 등과 함께 거사를 다시 도모하고 결사대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정미년(丁未年)인 1907년 3월 25일에 을사오적을 일망타진 하는 계획을 실행하였으나 실패하고 큰 고초를 당했다는 사실들을 정리하였다.
ⅱ) 대종교 중광 활동이다. 그의 대종교 중광 활동은 구국활동에 부단한 노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한계에 부딪치자 그 무렵 1905년 11월과 1908년 12월에 각각 서울 서대문역과 일본 동경에서 백두산으로부터 온 백봉(白峯)의 사자(使者)인 백전(伯佺)과 두일백(杜一白)을 만나면서 구국운동의 방향을 전환하고 민족의 결집과 구국을 위해 단군교(檀君敎) 즉 대종교(大倧敎)를 중광(重光)하였다는 사실과 일제 강점 하에서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민족 독립운동 단체로 지정되어 탄압을 받게 되자 백두산 북쪽인 중국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로 대종교 총본사를 이전(移轉)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전(移轉) 후에 청일학교(靑一學校)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게 하는 한편 포교활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총본사 산하에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4도본사(四道本司)를 설치하고 포교 활동을 하여 대종교 교도 수가 30만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들을 정리하였다. 그로 인해 서간도에 개설한 동창학교와 더불어 활동도 줄곧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고 회유와 협박을 거듭하다가 일제는 중국관헌과 교섭해 동창학교 폐지와 교사(校舍) 축출령이 내려져 동창학교는 끝내 강제 폐교되고 말았다는 사실 등을 정리하였다.
ⅲ) 나철의 조천(朝天)이다. 일제 강점 하에서는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민족 독립운동 단체로 지정되어 탄압을 받게 되자 대종교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돌아와 남도교구에서 교단조직과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191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는 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을 발표하고 국내 종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므로 어려움이 더욱 커졌다는 사실과 설상가상으로 당시 조선 총독부령에는 신도(神道), 불교, 기독교만을 공인 종교로 인정하고 나머지 종교 단체에 대해서는 공인 종교가 아닌 유사 종교단체로 지정해 경무국의 관리까지 받게 되자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나철은 동년 12월 21일에 대종교를 한국의 신도(神道)로 신고하여 공인 종교로서의 인가를 받고자 하였지만 실패했다는 사실 그 후 나철은 총독부 조치에 분개(憤慨)하면서 또 다시 서울에 있는 남도본사를 떠나 1916년 음력 8월 4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로 출발하여 그 곳에 도착한 후 시자(侍者)들과 함께 폐허가 된 건물을 수리하고는 8월 15일 새벽 1시 교인(敎人) 31인과 함께 선의식(䄠儀式)을 올리고 수도실(修道室)에 들어가 “오늘 상오 3시부터 시작해 3일간 절식 수도를 하니 이 문을 열지 말라.(自今日上午三時爲始 三日間絶食修道 切勿開此門)”는 글을 써서 문 중앙에 붙이고 수행을 하다가 유서(遺書)를 남긴 후 폐기법(閉氣法)으로 대종교와 국가를 위해 자진 순교․순국(殉敎․殉國)한 사실을 정리하였다.
ⅳ) 나철이 남긴 유서이다. 그의 유서를 바탕으로 한 장례의식과 조천의 역사적 의미를 정리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遺書) 중 「순명삼조(殉命三條)」, 「이세가(離世歌)」, 「중광가(重光歌)」 및 「여일본총리대외서(與日本總理大隈書)」, 「여조선총독사내서(與朝鮮總督寺內書)」 등을 바탕으로 조천의 의미와 대종교인들에게 커다란 감화를 주었다는 사실, 나아가 대종교인들이 주도한 독립운동이 무장 항일독립운동사에 최대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단군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문ㆍ사ㆍ철(文ㆍ史ㆍ哲)의 국학운동에도 큰 업적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토대와 홍익인간(弘益人間)구현을 위한 성역의식(聖域意識)에 기여 했다는 사실을 정리하였다.
이처럼 한말 홍암 나철은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 구국운동에 선봉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결실을 맺지 못하자 구국을 위한 새로운 방법의 일환으로 대종교를 중광(重光)하였고 구국운동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끈질긴 탄압으로 대종교 활동과 구국운동이 위기에 처해지게 되자 대종교를 위하고 구국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순교(殉敎)하고 순국(殉國)하였다. 이후 그의 뜻을 받들어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개한 무장 항일투쟁과 교육운동은 더욱 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 또는 천도교에 비해 역사적 연구가 매우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 대해 論者는 그 역할이 구국운동과 민족운동이라는 관점보다 종교적 관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철과 대종교는 구국운동과 민족운동을 기반으로 시작하여 범 인류의 평화운동으로 확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종교사적 관점 이전에 나철의 대종교 중광과 활동 및 그의 ‘조천(朝天)’과 유서(遺書)는 한국근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이기에 논자(論者)는 그 역사성을 바탕으로 논지(論旨)를 펼치고 논증(論證)을 하였다는 것이 이 논문의 요지임을 밝힌다. 다시 말해 대종교 중광은 구국운동을 위한 새로운 방법의 일환이었고 그의 조천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부터 대종교를 위하고 나라의 구국운동 활성화를 위해 구월산 삼성사에서 마지막 선의식을 올린 후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순교하고 순국했다. 그리고 그의 조천으로 인해 대종교 중심의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 되었고, 홍익인간(弘益人間) 구현을 위한 성역의식(聖域意識)에도 기여했으며, 국학사상의 확립에도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유서에 의해 집행된 장례의식은 절차와 격식을 간소화하고 검소화하기 위한 노력도 하였다는 것이 이 논문의 요지이다.
Author(s)
허태근
Issued Date
2015
Awarded Date
2015. 2
Type
Dissertation
Publisher
부경대학교 대학원
URI
https://repository.pknu.ac.kr:8443/handle/2021.oak/12251
http://pknu.dcollection.net/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1967870
Alternative Author(s)
Heo, Taegeun
Affiliation
부경대학교 대학원
Department
대학원 사학과
Advisor
신명호
Table Of Contents
Ⅰ. 서 론 1
1. 연구 背景 및 목적 1
2. 연구 範圍 및 방법 4
3. 先行 硏究의 정리 7

Ⅱ. 大倧敎 重光 以前 羅喆의 救國活動 11

1節. 羅喆의 家系와 立身 11
1. 家系와 修學 11
2. 金允植 門人으로서 立身 12

2節. 乙巳勒約 前後의 救國活動 14
1. 乙巳勒約 直前의 救國活動 14
1) 三國提携論에 바탕을 둔 東洋平和論 14
2) 非暴力 民間外交活動 18
3) 愛國啓蒙運動과 民間外交活動을 通한 救國活動 22
2. 乙巳勒約 直後의 救國活動 23
1) 乙巳五賊 處斷義擧 展開 23
2) 羅喆 初期 救國活動의 意義 26
Ⅲ. 大倧敎 重光 이후 羅喆의 救國活動 28

1節. 大倧敎 重光의 背景 28
1. 4次 渡日 外交의 실패 28
2. 白峯 敎團으로부터 檀君敎 傳受 33
1) 白峯 敎團과의 遭遇 33
2) 白峯 敎團의 實體 34
3) 白峯 敎團의 歷史觀, 民族意識, 宗敎觀 38
(1) 歷史觀 38
(2) 民族意識 42
(3) 宗敎觀 43
3. 檀君民族主義的 救國運動 46

2節. 大倧敎 重光과 布敎 活動 51
1. 大倧敎의 重光 51
2. 大倧敎 初期의 思想 52
1) 神觀 53
2) 來世觀 56
3) 救援觀 58
3. 羅喆의 초기 布敎 活動 61
4. 大倧敎 重光의 民族史的 意味 65
1) 民族宗敎史的 의미 65
2) 檀君民族主義的 의미 66

3節. 大倧敎 重光 以後의 變化 69
1. 敎團의 內外 위기 69
1) 羅喆과 鄭薰謨의 分立 69
2) 公州施敎堂 사건(1911) 71
2. 羅喆의 儀禮 정비 83
1) 儀式規例 制定 83
2) 敎名 變更 90
3) 檀君 地位의 格上 92
4) 開天節 制定과 儀禮 改革 94

Ⅳ. 羅喆의 朝天과 歷史的 意義 98
1節. 朝天 98
1. 朝天 98
1) 朝天의 경위 98
2) 朝天의 배경 101
2. 䄠儀式 103
1) 䄠儀式 의미 103
2) 䄠儀式 절차 105
3) 䄠儀式 성격 109
3. 葬禮 禮式 111
1) 나철의 장례예식 과정 111
2) 장례의례의 特徵 115
(1) 외래식 장례문화 打破 115
(2) 허례허식 打破 118
(3) 희생제의적 性格 121

2節. 遺書 124
1. 對日 遺書 124
1) 與日本總理大隈書 126
2) 與朝鮮總督寺內書 126
2. 宗團에 남긴 遺書 128
1) 重光歌(거듭 빛 노래) 128
2) 殉命三條 130
3) 遺贈(普和堂宗師에게 남긴 遺書) 131
4) 遺誡葬事七條 132
3. 家族과 知人에게 남긴 遺書 133
1) 家中遺書(다섯 자식에게 보내는 遺書) 133
2) 사위와 딸에게 남긴 遺書 134
3) 小雲 黃炳郁에게 남긴 遺書 136
4) 普本 嚴柱天에게 남긴 遺書 140

3節. 羅喆 朝天의 歷史的 意味 141
1. 檀君民族主義와 聖域意識 確立 141
2. 抗日獨立運動의 精神的 原動力 145
3. 近代的 國學運動의 活性化 150
1) 羅喆 思想의 國學的 要素 150
(1) 羅喆의 國語 認識 151
(2) 羅喆의 國史 認識 154
(3) 羅喆의 國敎 認識 157
(4) 羅喆의 哲學 認識 159
2) 國學運動의 전개와 羅喆의 位相 160
(1) 國學運動의 전개와 羅喆 160
(2) 國史運動의 전개와 羅喆 161
(3) 哲學運動의 전개와 羅喆 163


Ⅴ. 결 론 166

참고문헌 173
ABSTRACT 177
Degree
Do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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