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교린체제와 남방무역
- Alternative Title
- The Doctrinal System and Southern Trade During the Early Joseon
- Abstract
- 본 연구는 조선 초기 조선의 남방 국가에 대한 외교적 인식과 그 인식을 기초로 한 일본과 유구 및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무역 활동의 전개와 수입품이 조선에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알아보고, 이를 통해서 당시의 조선 사회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 초기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중국대륙에서는 명이 건국되었고, 일본열도는 혼란의 남북조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유구열도에서는 세 개로 나뉘어졌던 소국들이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다.
조선의 외교 정책은 사대교린을 기본으로 하였다. 명에 대해서는 사대를 하고 이외의 나라들은 교린을 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하지만 교린에도 대등한 관계로 인식하는 적례교린과 조선을 우위에 두고 주변 국가를 교화의 대상으로 보는 기미교린의 두 가지 교린체계로 상대를 대하였다.
남방의 국가들의 경우 일본의 막부나 유구의 경우는 적례교린의 대상으로, 일본의 지방 세력들이나 대마도,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기미교린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무역의 경우에는 그 목적이 동일하지 않다. 일본의 경우는 무역의 목적이 왜구의 근절이 우선이었고, 유구나 동남아시아의 경우에는 교린의 방식으로 먼 곳에서 온 이웃을 후하게 대접하기 위함이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그 원인 중의 하나가 왜구의 침입이었다. 왜구는 고려를 빈번히 침입해 고려 조정의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로써 고려 내부의 중앙집권적인 힘은 약해졌고, 외부의 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신흥 무인세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흥 무인세력 중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의 실질적인 실력자가 되었고, 신흥 사대부와 뜻을 같이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하여 왜구의 침입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국방력을 강화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회유책으로 일본인들에게 무역을 허락하였다. 왜구를 평화로운 통교자로 전환을 유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한문종 「조선전기 倭人統制策과 통교위반자의 처리」, 일본사상 7, 2004, p56.
유구는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와의 중간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중계무역을 시작하였다. 명과의 무역에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조선이나 일본과의 무역에는 위험이 뒤따랐다. 조선이나 일본으로 오다가 왜구들에게 재물과 인명을 잃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유구는 조선과 일본 간의 무역에는 사쓰마(薩摩)나 하카타(博多)의 상인들을 통한 무역으로 전환하였다. 때로는 하카타 상인을 유구국 사신으로 삼아 조선으로 보내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서 일본의 상인들은 실제 유구의 사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신인 것처럼 행사하여 조선과의 유리한 거래를 이끌어 내려 한 경우도 많았다.
동남아시아의 경우 고려 말 공양왕 때 섬라곡국 내공(奈工)이, 조선 태조 때 역시 섬라곡국 장사도(張思道), 태종 때에 조와국 진언상(陳彦祥)이 내빙하였다. 조선의 경우 그들을 교린의 대상으로 후하게 대접하였으나 조선과의 무역은 지속될 수 없었다. 명나라의 해금정책으로 인해 안정적인 조공무역과 많은 이익으로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은 명나라와의 무역에 집중하였다. 조선과의 무역은 조선으로 가는 뱃길에서 만날 수 있는 왜구의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강행하는 것에 회의적이었을 것이고, 조선 조정 또한 중국이나 일본, 여진에 비해서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상호 통교 필요성에 대해서 절실하지 않았다.
조선 초기 남방에서 수입된 50여 가지의 물품 중에 대표적인 10가지를 연구하였는데, 특히 한의학의 약재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다. 약재 활용에 대해서는 이시진의 본초강목과 허준의 동의보감을 기본 자료로 이용하였다. 본초강목(1596)과 동의보감(1610)은 조선 중기에 간행되었지만, 한의학을 집대성한 저서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약재로 쓰인 경우 이외에도 각각의 수입품들의 특성을 이용하여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사료와 선행연구를 통하여 정리해 보았다.
본고에 살펴본 10가지의 수입품을 보면 수우각을 제외하고는 모두 약용으로 이용되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초기에도 한반도에서 산출되는 약재가 있었고, 이에 대한 서적도 간행되었지만. 수입 약재에 대한 인기는 한반도에서 산출된 약재보다 많았다. 수입 약재는 수요가 많은 반면에 공급은 원활하지 못했고 워낙 고가였기 때문에 약재를 제때에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시기를 놓쳐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수입 약재에 대한 욕구를 버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밖에 수우각은 조선 국방의 필수인 각궁을 만드는데 필수불가결한 재료였고, 소목은 홍화를 대신하는 염료로서 각광을 받았다. 또한 소목으로 염색할 때 염매제로 사용되는 중요한 물품이 명반, 백반이었다. 유황은 국방력 강화에 필요한 화약 제조에 없어서는 안 될 물품이었다. 서각이나 상아는 관료의 품계를 구분지울 수 있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조선 초기 남방 국가와의 무역에서 수입된 품목은 50여 가지가 넘는다. 이 중에 실제 조선 사회에서 필요한 물건도 있었을 것이고 단순한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교린의 정책으로 필요하지 않는 물건이라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활용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매우 드물고, 있더라도 매우 간략하게 되어 있어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연구에는 한계가 있었다. 향후 교역품에 대한 더 폭 넓은 조사를 통하여 조선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 Author(s)
- 김동우
- Issued Date
- 2021
- Awarded Date
- 2021. 8
- Type
- Dissertation
- Keyword
- 교린체제 남방무역품 일본 유구 동남아시아
- Publisher
- 부경대학교
- URI
- https://repository.pknu.ac.kr:8443/handle/2021.oak/1247
http://pknu.dcollection.net/jsp/common/DcLoOrgPer.jsp?sItemId=200000506544
- Alternative Author(s)
- Dong woo Kim
- Affiliation
- 부경대학교 글로벌정책대학원
- Department
- 글로벌정책대학원 문화학부 한국문화학전공
- Advisor
- 이근우
- Table Of Contents
- Ⅰ. 머리말 1
1. 고려 말 조선 초 동아시아의 형세(形勢) 1
2. 조선의 교린정책과 남방무역 2
3. 연구 목적 5
Ⅱ. 남방 무역 8
1. 일본(日本)과의 무역 8
1) 대일 무역의 전개 8
2) 왜구와 대일무역 9
3) 왜관(倭館)의 설치와 왜인 통제책(倭人統制策) 12
4) 사무역(私貿易)의 허용과 교역품의 처리 문제 16
2. 유구(琉球)와의 무역 19
1) 대유구 무역의 전개 19
2) 일본을 통한 중계무역과 위사문제(僞使問題) 21
3) 서구열강의 아시아 진출과 유구 중계무역의 쇠퇴 23
3. 동남아시아와의 무역 26
Ⅲ. 남방 무역품 31
1. 식용 및 약용품 31
1) 후추(胡椒) 31
2) 빈랑(檳榔) 35
3) 정향(丁香) 37
4) 육두구(肉荳蔲) 40
2. 비식용품 43
1) 수우각(水牛角) 43
2) 소목(蘇木), 단목(丹木) 46
3) 명반(明礬), 백반(白磻) 49
4) 서각(犀角) 52
5) 유황(硫黃) 56
6) 상아(象牙) 59
Ⅳ. 맺음말 62
참고문헌 66
Abstract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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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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