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중고기 국가 조영사업 연구
- Alternative Title
- A Study on the National Construction Project in the Mid-Silla Period
- Abstract
- 신라의 조영사업은 국가형성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들이 유형별로 구분되고 그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시점은 중고기부터이다. 여기서는 중고기에 국가 조영사업이 어떻게 기획·운영되고 조영방식이 체계화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먼저 신라의 조영사업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여 조영기록의 특징과 조영 양상의 변화를 검토하였다. 신라 조영기록을 ‘조영물(A), 공사의 추진 주체(B), 역부(C), 규모(D)’라는 네 가지 요소로 유형을 분류하였다. 이에 따라 문헌사료에서는 조영물(A)만 기재한 [가]유형, 조영의 책임자나 추진 주체(B)를 기재한 [나]유형, 역부의 정보(C)를 함께 기재한 [다]유형, 조영물의 전체 규모(D)를 기재한 [라]유형이 나타났다. 또 금석문으로는 築城碑와 築堤碑가 있는데, 築城碑는 전체 규모가 아닌 受作거리를 기준으로, 築堤碑는 규모와 역부의 수를 기준으로 양식화됨을 살펴보았다.
신라의 조영기록은 [가]유형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築堤는 조영 주체로는 州郡과 有司로 양분되어 나타났고, 일반적인 규모의 수리시설은 역부의 수가 강조된 [다]유형이, 벽골제나 시제와 같은 대규모 築堤는 [라]유형으로 나타났다. 築城은 5세기 중반부터 특정 지역의 역부 동원이 강조된 [다]유형이었다가 6세기 중반 이후에는 전체 규모[周]를 기재한 [라]유형으로 바뀌었다. 築城과 築堤 모두 역부에 대한 정보가 강조된 이유는 비숙련 노동력이 집약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조영사업의 특성 때문이었다. 반면 숙련 기술 인력을 순차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특징을 가진 사찰 및 왕경 도시건설은 [가]유형의 기사가 대부분이었지만 조영 주체를 밝힌 [나]유형의 기사도 나타났다. 이와 같은 특성에 따라 중고기 국가 조영사업은 사원 및 왕경 도시건설, 築堤, 築城으로 나누어 신라의 국가 조영사업이 어떻게 결정되고 어떻게 실행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신라의 국가 조영사업을 추진하는 조영 주체는 州郡, 將軍이나 軍主와 같은 兵部系 인물, 有司·所司와 같은 실무조직 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초기에는 임시의 인적조직에 불과했던 有司·所司가 실무 행정조직인 典으로 발전하고 재정과 기밀 업무를 관장하는 典大等이 출현하였다. 兵部도 진평왕대에 屬司가 설치되고 병부 소속의 大監·弟監이 설치되면서 力役의 배치업무를 담당하고 停 군단의 장군 중 재정을 관장할 수 있는 衿荷라는 지위를 가진 龍樹와 같은 兵部系 인물이 출현하였다. 이와 같이 典大等과 衿荷가 등장하고 兵部가 정비되면서 중고기 국가 조영사업의 관련 官府를 확인하였다.
국가 조영사업이 王命이나 敎令로 결정되어 집행 실무조직인 有司에 의해 조영된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는 법흥왕 18년(531) 有司에게 내린 제방을 修理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를 위해 有司가 지방에 使人을 보내 조영한 결과가 법흥왕 23년(536)에 건립된 이었다. 이 비석에 따르면 塢의 입지와 위치 선정, 역부의 동원지역 등은 조영 주체인 有司가, 구체적인 설계와 공역 하부조직 구성 등은 현지에 파견된 使人이 담당하였다. 使人은 동시대 지방관인 道使의 관등에 비견되는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使人은 현지 촌주의 협조 하에 塢作지역 개간을 주도한 客人과 함께 공역 하부조직을 구성하고 作人을 동원하여 조영하였다.
그런데 6세기 전반부터 시작된 왕경의 사찰 조영과 도시 건설은 제방 수리와 같이 지방에 분산된 소규모 공사와는 그 양상이 달랐다. 신라의 불교 공인 이후 추진한 흥륜사와 황룡사의 건립과정을 보면, 사찰 조영은 목조ㆍ석조ㆍ철제ㆍ기와ㆍ장엄 등 다방면의 기술 인력이 참여하는 종합적이고 대규모의 조영사업이었고, 사찰 조영사업이 왕경 도시정비와 함께 이루어졌다. 敎令으로 조영이 결정되어 有司·所司가 추진한 흥륜사와 황룡사의 조영기록을 살펴보면 대지 조성, 담장, 불상과 금당 조성, 탑 등 각 과제별로 공사가 끝날 때마다 결과가 보고되었다. 대지조성, 담장, 불상 등은 모두 기술인력과 자재가 다르기 때문에 각 공사가 시작될 때마다 해당 과제에 대한 有司가 구성되어 공사를 시행했고 해당 과제가 끝나면 “畢”이라고 하여 완료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영방식은 왕경 도시건설 및 사찰 조영사업을 지속적이고 일관성있게 추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진평왕대부터 대규모의 왕경 도시건설 및 사찰 조영사업에 대한 기록에는 왕경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숙련된 다종의 기술자를 오랫동안 관리ㆍ운영할 책임자가 등장한다. 鼻荊郞·吉逹 설화에서는 角干 林宗이, 에서는 伊干 龍樹가 그들이었다. 그들은 왕실 수공업의 匠人을 관리하는 內省 私臣이거나 대규모 병력을 통솔한 경험이 있는 大將軍의 관력을 가진 인물들이었고 진평왕대에 衿荷라고 지칭될만한 존재였다. 이러한 조영 책임자는 대단위의 사찰과 왕경 도시건설을 맡은 뒤 에 등장하는 首力知奈末이나 執事였던 鼻荊郞·吉逹에게 소단위 또는 과제별로 공사를 분담시켜 축조시켰다. 대단위 공사의 조영 책임자가 奈麻나 執事 등의 공역 하부조직을 구성하여 소단위 또는 공정별 공사를 분담시켜 조영사업을 진행하였다.
다음으로, 역부의 기록이 강조된 [다]유형의 조영사업은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를 주목하였다. 그 중에서 역부의 징발기준이 강조된 자비·소지왕대의 築城기록은 이후 복속·점령지역의 역부를 징발하는 계기가 되어 力役制度의 성립과 관련하여 주목받았다. 그러나 역부의 수가 강조된 조영은 築堤碑에서 주로 확인되는데, 특히 를 주목하였다.
고대 중국의 算數書나 簡牘에서는 조영사업의 축조 규모에 따라 필요한 노동량을 산정하는 방식으로 조영을 기획해왔다. 축조 규모에 따라 총 노동량(연인원)을 산정하면 필요한 역부의 수와 공사 기간을 조율하여 조영을 기획·운영해왔다. 그런데 고대 중국의 영선행정에서 노동량을 뜻하는 용어인 “功夫”는 진지왕 3년(578)에 건립된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비문을 분석한 결과, 6세기 후반 신라에서도 고대 중국의 영선행정에 보이는 표준 노동량에 대한 데이터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塢作을 기획할 때 중국의 算術書에서와 같이 노동량을 산정하여 역부와 공사기간을 조율했음을 확인하였다. 에 보이는 재지세력의 역역 편성방식은 국가 조영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築城사업에서도 볼 수 있는 편제방식이었다. 게다가 규모에 따른 노동량에 대한 정보를 비문을 통해 공시함으로써 塢作이 공식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거친 국가 조영사업임을 공표하였다. 그런데 雨天과 같은 현장의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312인이라는 인원을 고정하여 13일간 공사했음은, 재지세력의 공동체적 力役에 기반된 신라사회의 특수성에 기인하였다. 고대 중국의 영성행정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 아니라 신라사회의 특성을 감안하여 변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영물의 전체 규모[周]에 대한 조영기록 즉 [라]유형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라]유형은 조영물의 전체 규모[周]를 공역 하부조직에게 受作하여 축조하는 周作形 조영방식으로 진행된 조영이었다. 周作形 조영방식은 상고기의 矢堤, 碧骨池를 제외하면 6세기 중반부터 왕경 방어체제에 속하는 축성사업에서 시작되어 7세기 이후에는 州‧小京城이나 관문 장성을 축조하는데 적용되었다. 周作形 조영방식의 구체적인 양상은 나 와 같은 중고기 築城碑를 통해 알 수 있었다. 築城碑는 축성의 전체상은 보여주지 않고 분담한 공사구간만을 알려주기 때문에 축성의 전체상을 살펴보기에 한계가 있어, 고구려 과 조선시대 축성자료를 원용하였다.
周作形 조영방식에서 축성기획은 평양성에서처럼 대구간을 설정하여 왕경 또는 州 단위로 분배하고, 대구간에서 왕경 또는 州 예하의 部·郡 단위로 중구간으로 나누었다. 는 중구간이 중심이 된 碑이고 는 중구간에서 다시 里·城·村 단위의 소구간을 기준으로 受作하고 碑를 건립하였다. 두 산성을 축조할 때 部·郡 단위의 중구간 受作은 대략 42보에서 46보가 기준으로 조선시대 축성 구간과 유사함도 밝혔다. 에서 에 따르면 체성 축조 책임이 소구간 즉 城·村·里단위까지 소형화되는 이유도 찾아보았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신라 중고기 조영사업의 운영방식에 대한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먼저 신라 중고기의 조영사업은 王命이나 敎令으로 결정되고 집행되었다. 이에 따라 비숙련 노동력을 집약적으로 투입해야 하는 築城이나 築堤와, 숙련 기술인력을 순차적이고 계획적으로 투입·관리해야 하는 사찰 및 왕경 도시건설로 나누었다.
사찰 및 왕경 도시건설의 경우 조영 주체가 공역 하부조직에게 소단위·개별 과제로 분담시켜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築堤의 경우 고대 중국의 영선행정을 차용하여 조영물 규모에 따라 노동량을 산정해서 역부의 수와 공사기간을 도출해내는 조영방식으로 추진하였다. 築城의 경우 역역제도가 확립된 중고기 이후에는 전체 규모[周]를 몇 구간으로 나누어 공역 하부조직에게 受作케하는 周作形 조영방식으로 축조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국가 조영사업은 조영물의 성격에 따라 조영 운영방식이 유형별로 달랐지만 신라의 역역제도와 연결되는 방식은 築堤든 築城이든 유사했다. 그리고 당시 고대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조영 기획방법이나 영선행정에 영향을 받았지만 이를 변용하여 周作形 조영방식으로 築城한다거나 신라 역역제도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유연하게 적용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의 국가 조영사업은 기획과 운영방식은 신라의 官制가 출현하여 조직적인 중앙행정체계가 발달하기 전부터 나타났으며 중대 조영사업을 관장하는 營繕官府의 출현하는 배경이 되었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disclose how the national construction project in the Mid-Silla Period planned and operated and how the construction method was systematized.
First of all, the written documents are analyzed by classifying the type[A] that recorded only the construction‘ name for the construction record of Silla, the type[B] that recorded the responsible person of construction or main body of undertaking, the type[C] that recorded the information of construction workers together, and the type[D] that recorded overall scale of the construction improvement. In the metal and stone writings, it was formalized into the Chukseong-bi(築城碑) and Chukje-bi(築堤碑).
The construction thar carried out the national construction project of Silla were practical working bodies, such as, locality(州 or 郡), such as a general or military commander(將軍 or 軍主), Temporary institution(有司Yusa or 所司Sosa). The Yusa(所司) had advanced to administrative agency for working affairs(典Jeon), with the emergence of Jeondaedeung(典大等). The military division was reshuffled into the King Jinpyeong(眞平王) Era with the emergence of miliary personnel with the position in Geumha(衿荷).
The national construction project of Silla was determined by the royal decree or order. According to built in the 23rd year of King Beopheung(法興王 536), the Yusa that was the superior agency for public service engaged in selection of location. Sain(使人) designed the construction and composed the subordinate organization of these construction
The constructions of Heungryun-sa(興輪寺) and Hwangryong-sa(皇龍寺) were undertaken together with the urban rearrangement of royal capital. The urban construction was referred as the Geumha(衿荷) in the King Jinpyeong Era, projects for temples and royal capital had the responsible person of construction dividing up the works for each task to impose the works to Nama, service men or other Yusas to process the works in the construction method for each task.
Next, the construction projects of the type[C] that emphasized the record of construction workers paid attention to that was built in the third year of King Jinji(眞智王 578). Through this monument writing analysis, Silla in the later part of the 6th century already had the data on the standard labor volume that was shown in the Youngseon Administration of ancient China, and when the work was devised, the labor volume was calculated to adjust the construction workers and work period as was done in the calculation writings of China.
Lastly, the construction record on entire scale of the construction improvement, namely, the style of type[D] has been reviewed. The type[D] is the construction processed in the Juzack-style(周作形) construction method to distribute construction work to the subordinate organization of fortress construction. The detailed trend could be shown through or and it is referred to of Goguryeo(高句麗) and the fortress construction data of Joseon Dynasty(朝鮮).
- Author(s)
- 이미란
- Issued Date
- 2022
- Awarded Date
- 2022. 2
- Type
- Dissertation
- Keyword
- 중고기 조영 토목 왕경 도시 건설 축성 축제 영천청제비 대구무술오작비 명활산성작성비 남산신성비 주작
- Publisher
- 부경대학교
- URI
- https://repository.pknu.ac.kr:8443/handle/2021.oak/24302
http://pknu.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602340
- Alternative Author(s)
- Lee, Miran
- Affiliation
- 부경대학교 대학원
- Department
- 대학원 사학과
- Advisor
- 이근우
- Table Of Contents
- Ⅰ. 서론 1
1. 연구의 필요성과 현황 1
2. 연구대상 및 방법 12
Ⅱ. 국가 조영기록과 그 특징 17
1. 문헌에 나타난 조영기록 19
1) 조영물 단독 기록 19
2) 조영 주체 중심 기록 23
3) 役夫 중심 기록 33
4) 전체 규모[周] 중심 기록 39
2. 금석문에 나타난 조영기록 48
Ⅲ. 조영 관련 官府의 출현 57
1. 5~6세기 실무조직과 典大等의 출현 59
1) 5~6세기 실무조직과 분화 59
2) 典의 분화와 典大等의 설치 67
2. 국가 조영사업의 추진 주체와 兵部의 정비 74
1) 兵部의 설치와 조영 관련 업무 74
2) 衿荷의 시대별 의미 변화 83
Ⅳ. 敎令의 집행과 조영사업 90
1. 敎令 집행에 의한 소규모 조영사업 90
2. 중고기 왕경의 대규모 조영사업 운영 105
3. 왕경 조영사업의 조영 주체와 공역조직 122
Ⅴ. 役夫 중심 조영사업의 기획과 운영방식 135
1. 고대 동아시아의 조영 기획 136
2. 로 본 役夫중심 조영 기획과 실행 150
1) 에 보이는 功夫의 도출과정 150
2) 도유나와 오작지역의 성격 161
Ⅵ. 周作形 조영사업의 기획과 운영 169
1. 築城碑의 조영 내용 171
1) 로 본 축성양상 171
2) 로 본 축성양상 180
2. 축성의 受作 분배방법과 작업공정 187
1) 受作 분배방법과 고구려와 조선의 축성사례 187
2) 신라의 石城 축조와 受作 분배 방식 201
Ⅵ. 결론 215
참고문헌 221
Abstract 232
- Degree
- Doct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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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원 >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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