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KYONG

抗日運動으로 본 東學革命과 3.1運動의 聯關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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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ernative Title
The connectivity between the Donghak Revolution and the March 1st Movement from the perspective of anti-Japanese activities
Abstract
대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사회에 맞선 농민주도의 혁명으로, 그로부터 25년여 시간이 지난 1919년 3·1운동은 식민 제국주의에 맞선 범종교, 학생 중심의 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 3·1운동을 핵심적으로 이끌었던 의암 손병희는 동학 천도교의 3대 교조로서, 그와 함께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두 혁명에 함께 참여했던 인물이 민족대표 33인 중 9명에 해당하며 뿐만아니라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15명이 동학 천도교 측 인물이었다면, 분명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는 동학 천도교가 어떤 형태로든 작용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상적인 물음에서 출발하였다.
이를 검증하는 연구 방법으로,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까지 시간 변화 흐름의 양상을 중심으로 그 연관성을 찾아 교차 검증 방법으로 연구하였다. 첫째, 의암 손병희라는 민족대표이자 동학 천도교 3대 교조였던 그의 1894년 동학농민혁명부터 1919년 3·1운동까지 그와 연관된 사실 행적 25년의 기록을 연구하였고, 둘째, 의암 손병희를 따라 함께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에 함께 했던 참여자 가족들의 구술채록과 행적을 통하여, 1894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대략 125년, 1919년 3·1운동으로부터는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탓으로 대부분 4~5대의 후손들, 즉 고손이나 증손의 증언을 통하여 대한민국 근대사에 뚜렷한 두 가지 큰 사건에 어떻게 대다수 민중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았고, 셋째, 의암 손병희라는 지도자와 그와 함께했던 참여자들과 때로는 그 후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현재까지 살아있는 동학 천도 교단이 시대와 함께했던 변화의 흐름에 따른 자취를 따라 가보았다. 전체 흐름을 알 수 있는 동학 연표와 비교적 덜 알려진 진주, 남해, 남원, 충남 서부, 경기 수원. 화성, 강원도 지역의 동학 천도교의 자취를 따라 그 흔적과 함께 지역의 3·1운동을 확인 해 보았다.
1894 동학농민혁명 이후와 1900년대 근대 종교인 천도교로 대고천하 하기 전까지 당시 수많은 동학의 지도자와 교도들이 혹세무민 사도난적이란 죄목으로 집요한 관의 추적을 당하며 순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25년여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 즉, 1910년 경술국치 한일 강제 병합이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다시, 3대 교조 의암 손병희를 중심으로 동학이라는 신앙 공동체의 상태를 탈피하여, 천도교라는 근대 종교로 전환하면서 망국의 슬픔과 분노를 간직한 오 갈 데 없는 백성들이 민족 종교 천도교를 의지처로 전국에서 들불처럼 모여들며, 의암 손병희가 과감하게 진행했던 근대 문명의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힘입어, 다양한 교육과 거침없는 민회 진보회 활동을 통한 갑진개화운동을 통하여 거듭난 백성들은 의식으로 무장한 민중으로 새롭게 깨어날 수 있게 되었다.
물 밀듯 밀려오는 교인들의 세력에 힘입어, 때를 놓치지 않고 일제 암흑기에서조차 당당한 모습으로 진행한 우이동 봉황각과 중앙대교당을 연이어 건축 함으로써 일제에 의하여 당시 천도교 모든 은행 계좌의 예금을 동결시키는 등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당시 백만 원이라는 거금의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였다. 독립운동자금 모금 운동은 전국 천도 교인들의 자긍심을 드높였으며, 우이동 숲속 봉황각에서 1912년 4월 15일부터 1914년 3월 25일까지 3년의 시간 동안 총 7회에 걸쳐, 전국 각 지역의 천도교 교역자 483명을 중심으로 진행했던 ‘49일 특별 연성 수련회’는, 단연코 의암 손병희의 철저한 준비 과정에서의 핵심적 업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19년 3·1운동을 앞두고,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전국에 ‘국권 회복을 위한 49일 특별기도회’(1월 5일부터~2월 하순까지)를 하달 시행케 함으로써 1919년 3·1운동 당시 전국 각지에서 구심점을 이루며, 수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연이어 3·1운동을 주도하게 된 양상을 본 연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을 통하여 1894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 3·1운동은 25년이란 긴 시간을 통하여 치밀하게 준비되었던 거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그렇게 긴 시간을 지탱할 수 있었던 원천은 바로 동학 천도교였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본 연구의 논지가 될 것이다.
Author(s)
허채봉
Issued Date
2022
Awarded Date
2022. 2
Type
Dissertation
Keyword
동학 3.1운동 천도교 동학혁명 의암 손병희 동학혁명과 3.1운동의 연관성 항일운동
Publisher
부경대학교
URI
https://repository.pknu.ac.kr:8443/handle/2021.oak/24404
http://pknu.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601875
Alternative Author(s)
Chae Bong HEO
Affiliation
부경대학교 글로벌정책대학원
Department
글로벌정책대학원 문화학부 한국문화학전공
Advisor
이근우
Table Of Contents
Ⅰ. 序論 1
1. 硏究 背景 및 目的 1
2. 硏究 範圍 및 方法 4
3. 先行 硏究의 整理 6

Ⅱ. 2차 東學農民革命 이후 大告天下까지 10
1節. 義菴 承統과 敎團 收拾 10
1. 東學農民革命 以後 收拾과 對策 10
1) 海月의 避身 成功과 決斷 10
2) 海月의 殉道와 義菴 承統 13
2. 開化 文明 路線 變更, 日本 亡命 留學 14
1) 日本 留學 人才 養成 15
2) 民會 進步會 甲辰開化運動 16
3) 人才 養成을 爲한 敎育 印刷 出版 事業 21
2節. 接主들의 大活躍 24
1.泰安 문장로 接主와 後孫 24
2.牙山 정태영 接主와 後孫 31
3.全國 각 지역 接主들의 活躍 34
3節. 大告天下와 天道敎의 合法化 40
1. 東學 天道敎 개칭 40
1) 天道敎 大憲 및 大敎區制 施行 42
2) 親日 進步會 黜黨 43
2. 天道敎의 合法化 45
1) 水雲과 海月의 伸寃 회복 45
2) 활발한 敎勢 擴張 45

Ⅲ. 1890年부터 1940年까지 東學 天道敎의 役割 48
1節. 國權守護를 爲한 抗日運動 51
1. 보은 斥倭洋倡義 運動 51
2. 日本軍 景福宮 侵奪 척결을 위한 抗日武裝蜂起 54
2節. 國權回復을 爲한 準備 55
1. 鳳凰閣과 中央大敎堂 建築 57
1) 鳳凰閣 建築 57
2) 獨立資金 마련을 爲한 中央大敎堂 建築 57
2. 特別煉性修練會 58
1) 鳳凰閣 特別煉性修練會 58
2) 國權回復을 爲한 49日 特別祈禱 實施 59
3. 天道敎 救國團 62
3節. 3·1運動 63
1. 3·1운동을 위한 準備 63
1) 大原則의 確立 63
2) 宗敎界 學生 糾合 64
3) 民族 代表 33人의 選定 65
4) 獨立宣言書, 絶體 絶命의 危機 66
2. 3·1運動 70
1) 1919年 3月 1日 70
2) 全國으로 번져가는 3·1獨立萬歲運動의 氣勢 72
3. 3·1運動 系譜圖 等狀 84

Ⅳ. 結論 87

參考文獻 89

Abstract 93

附錄 96
Degree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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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정책대학원 > 문화학부-한국문화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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